숙향의 투자 편지(92)- SLOW = LIFE

SLOW = LIFE vs SPEED = DEATH

차트에 대한 책 한 권을 읽는다면, 저는 김정환 님의 [차트의 기술, 2006]을 꼽습니다. (전통적인)가치투자를 지향한다고 하면서 웬 차트냐고 할지 모르지만 과거 주가 흐름을 간단하게 살펴보기에는 차트만한 게 없기 때문이지요.

이 책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한 멋진 글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다음 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인도에 있는 다지어링 히말라야 특급 열차에 적혀 있는 글이라고 하는군요.

'SLOW'는 4개의 철자로 되어 있고 'LIFE'도 그렇다. 'SPEED'는 5개의 철자로 되어 있고 'DEATH'도 그렇다.

서두르지 않으면 살 것이고 서두르면 죽는다! 처음 이 글을 보았을 때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옛 생각이 나더군요.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는 친구들과 매일처럼 축구 하면서 놀던 공터가 있었는데요. 공터는 큰 길과 연결되었는데 길 한쪽 끝으로는 철로가 가로질렀고 건널목이 있었습니다. 건널목에는 기차가 지나갈 때면 통행을 막기 위해 설치된 가름쇠와 가름쇠를 고정하는 기둥이 있었고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5분 빨리 가려다 50년 먼저 간다.

철도 건널목에서 멈춰버린 승용차가 달려오던 기차에 부딪친 사고를 딱 한 번 보았는데, 그래서 그 글귀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제 마음 깊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미 소개했듯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글귀는 느긋함을 강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훈입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서두르지 말라.

워런 버핏이 강조했던 말도 그렇습니다. 엘리스 슈뢰더에게 쓰도록 했던 그의 전기 제목, [스노볼]이 의미하는 것은 단단하게 뭉친 작은 눈덩이를 언덕 위에서 굴러내려 큰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죠. 오랜 시간에 걸쳐 불려나가는 복리의 힘 말입니다.

주식투자에 입문한 사람들이 투자를 시작한 이유로 가장 많이 하는 얘기는, ‘은행 금리가 너무 낮기 때문에 좀더 높은 수익을 얻고 싶어서 주식투자를 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금 손실 없이 은행 이자보다 조금 더 많은 수입만 올리면 만족한다고 하죠.

그렇게 소박한 마음으로 시장에 들어선 이들이 주식시장의 혼란스런 분위기에 휩쓸리는 것은 순간입니다. 하루에 30%를 먹을 수 있는 주식이 저렇게 많은데 그 중 하나만 잘 찍으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거든요. 하지만 이런 종목을 찾으려 애쓰거나 혹은 콕 집어줄 것 같은 점쟁이를 찾아 다니다가는 오래지 않아 아웃되고 맙니다.

안전하게 투자금을 불려준다는 가치투자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싼 주식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한데 이 포트폴리오에 담긴 주식들은 다른 주식들이 벌겋게 올라가는 동안 찔끔 오르고 말거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울화통이 터집니다. 그래서 금방 오를 것 같은 주식을 따라다니게 되고, 초심에서 벗어난, 노고의 끝은 빈손으로 아웃되는 것이고요.

‘High Risk & High Return’이라는 말처럼 금방 부자가 되기 위해 그만큼 위험을 감수하면 돼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사람은 1만 명 중 한 명입니다. 애당초 확률이 매우 낮은 일이라는 것이죠.


제가 실행하고 있고 추천하는 투자법은 더디지만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투자법입니다. 4(3)가지 투자지표를 이용해서 싼 주식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운용하기 때문에 퀀트투자와 비슷합니다. 퀀트 전문가 한 분이 제 투자 방법으로 1년에 한번씩 조정했더니 제가 실제 올린 것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조건에 맞는 주식들로 포트폴리오를 만든 다음 1년 단위로 리밸런싱 하는 방법도 괜찮을 듯합니다.

다만 저의 투자법은 퀀트와 마찬가지로 기업 분석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만 재무제표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재무제표 읽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투자를 시작할 때는 PER, PBR, PDR 등 3가지 투자지표를 이해할 정도면 되지만 한 단계 발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경영의 언어 회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편지는 왠지 잔소리로 들릴 것 같은 느낌이네요.
모쪼록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셨기를 바라면서……
숙향 배상

추신: 차트 책을 한 권 얘기했듯이 회계를 공부하려는 투자자에게 제가 추천하고 싶은 한 권의 책은, [박 회계사의 재무제표 분석법]입니다. 저는 주식투자자의 관점에서, 회계를 깊이 알 필요는 없고, 재무제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은 적당합니다. 비전공자에게 처음 맞닥뜨리는 회계는 외계어처럼 보인다고 하는 분도 있더군요. 평생 할 투자를 위해 필요한 것이므로 너무 겁내지 마시고 천천히 배우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