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향의 투자 편지(87)- 베테랑, 시장에서 살아남은(2)

베테랑(2)
- 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오랫동안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투자자를 사람들은 흔히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저는 1985년 회사 지시로 ‘KOREA FUND’에 대해 조사하면서 ‘주식투자는 도박’이라는 기존 관념을 깨고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남았고요.

지난 편지에서 대가들의 일화를 통해 해외 베테랑에 대한 얘기를 들려드렸다면 오늘은 우리나라 증권시장에서 만났던 우리 토종 베테랑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합니다.

2016년 연말, 본사를 명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신증권은 여의도 신영증권 건물을 임차해 쓰고 있었습니다. 1층 넓은 영업장 한 쪽 벽면은 시세를 알려주는 큰 전광판이 차지했는데, TV에서 증시 뉴스를 보도하는 화면에 단골로 등장하던 곳이었죠. 대신증권이 이전하면서 명물이던 이 전광판도 함께 철거되었는데요.

HTS도 발전했고 따라서 기능을 상실한데다 비용만 많이 먹는 시세판은 이미 대부분의 증권사 영업점에서는 철거된 때였으므로 대신증권 본사의 대형 시세판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했지만 저에게는 하나의 상징이 사라지는 (아쉬운)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보다 앞선 대부분의 증권사 영업장에는 시세판이 설치되어 있고, 주식 매매 주문을 전화로 내던 시절 시세판 앞 소파에는 상주하는 (대부분)중늙은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시장이 좋으면 빈자리가 없고 시장이 나쁘면 일찌감치 낮술 하러 나가는 통에 텅 비곤 했고요.

저는 은행 업무를 위해 출장 나왔다 귀사 할 때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이 증권사를 찾아 들렀는데요. 시세를 확인하고 있노라면 소파에 앉은 중늙은이들의 대화가 들려옵니다. ‘그래서 이 종목이 오르고 저래서 저 종목은 내리고 있고 지금은 뭐가 좋으니까 뭘 사야 하고 등 등 등.’ 시장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의 족집게 강의를 듣는 것이죠.

주식시장이 과열되어 오를 때까지 올랐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눈과 몸으로 직접 확인하기도 합니다. 객장 소파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가 싶다 보면 어느새 북적이고 다음은 애기 업은 엄마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객장에 설치된 모니터로 시세를 확인하는 베테랑에게 다가가서는 조심스레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어떤지 물어봅니다. 친절한 베테랑은 열심히 설명하고요. 잘 되었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익히 알듯이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투자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장은 절벽을 타고 내리고 우리는 올라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꽃을 내려오면서 보게 되죠. 차가워진 시장은 가끔 들르는 증권사 객장의 소파가 휑하게 비어있는 것을 보면서 아직 봄이 멀었음을 짐작합니다. (낮술 즐기려고 잠깐 자리를 비웠을 것 같지는 않은)베테랑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어느 순간 다시 시장에서 온기를 느끼게 됩니다.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 중에는 눈에 익은 분도 보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워낙 없으니까 객장에 나오기 민망해서 재택근무를 했을지도 모르죠. 가끔 짜증스러울 때도 있었던 그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게 시장은 여름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나고요.

거래하는 증권사조차 언제 방문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지금은 온라인 상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로 시장 상황을 짐작합니다. 방문자, 게재 글 숫자, 언급되는 종목들의 성격 빈번도 등으로 말이죠.

요즘 제 눈에 가장 많이 보이는 글은, ‘국장(국내시장)을 떠나 미장(미국시장)으로 가자’인데요. 저에게는 국내 증시는 바닥이고 미국 증시는 천장으로 읽힙니다. 해외 주식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저의 편견이 한 가득 담겼지만 그래도 제가 옳게 봤을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낼 모레 보낼 다음 편지는 벌써 2월 마지막 편지가 되네요.
새삼스레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마음만은 느긋하게 그래서 길게 보는 것이 투자자로서 갖춰야 할 가장 바람직한 자세이겠지요.

숙향 배상

추신: 아직 주식투자를 하기 전인 1985년 2월, 딱 이맘때네요. 회사 지시로 ‘SK(당시 유공)’ 주주총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주식, 주주총회에 대한 첫 경험이었죠. 당시 주총장 제 옆자리에서 한담을 나누던 중늙은이 두 분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이때 언급된 종목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저에게는 나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저의 첫 베테랑과의 만남은, 그래서, 썩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 58번째 편지, 삼환기업 투자 실패 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