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글]한국에서 고전하는 유통 공룡

▲ 한국 소비자들은 할인점에서도 백화점식 쇼핑을 원한다.월마트는 여전히 창고형 매장을 고집하고 있다.월마트 일산점.

세계 최대 할인점 월마트가 한국서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악전고투하고 있다. 한국 소비자에게 한국산 제품을 ‘미국식’으로 팔려고 고집했던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주부김주영씨(32)는 4년전 경기도 일산으로 이사왔을 때 만해도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월마트에서 장을 봤다.그러나 지금은 월마트를 지나쳐 2km나 떨어진 농협하나로마트나 5km를 달려 이마트에 간다. 그녀는 “월마트에선 쇼핑카트에 아이를 태울 수도 없고, 마치 재고품을 쌓아놓은 어두침침한 창고에서 쇼핑하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1962년 미국 아칸소주에 첫 점포를 낸 월마트는 현재 전세계에 4,300개가 넘는 점포를 운영하는 세계 최대 할인점이다. 지난해 2,198억달러(270조원)의 매출을 올려 2위 까르푸(매출 620억달러)와의 격차를 3배 이상으로 벌려놓았다. 올 매출도 2,500억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점쳐진다.

그처럼 위세당당한 월마트가 유독 한국에서는 맥을 못춘다.

한국에 진출한 지 5년이나 됐지만 점포수가 15개에 그치고 있는데다 점포 당 평균 연매출에서도 이마트(1,100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업계에선 추정한다. 지난해 매출 ‘톱10’ 점포 리스트에 단 한 개의 점포도 올려놓지 못했다. 토종 할인점 이마트가 지난해 연매출 5조6,000억원을 돌파할 동안 월마트는 그 7분의 1에도 못 미쳤다. 월마트는 롯데마트는 물론이고 까르푸, 테스코(홈플러스) 등 외국계에도 뒤처진다. 신세계 이마트 사업부의 한 직원은 “월마트가 한국에 진출할 당시엔 막강한 배경 때문에 위협을 느꼈던 게 사실”이라며 “하지만 지금은 월마트가 무엇을 하든 별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세계 최고의 유통 노하우를 가진 월마트가 한국에서 고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처음부터 한국을 잘 몰랐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한국 진출 초기 월마트 매장에서 근무했던 K씨가 들려준 해프닝은 월마트가 얼마나 한국 소비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마크로 인수 직후 월마트는 ‘수퍼세일’이라는 파격적인 할인행사를 벌였다.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마크로로 몰려들었다.

사건은 바로 그 때 발생했다. 쇼핑을 마치고 나가는 고객에게 안전요원이 영수증 제시를 요구하고 쇼핑봉투 내 물품들과 영수증을 대조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K씨는 “그것은 미국 본사의 방침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며 “이처럼 한국적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은 월마트 본사의 실책은 셀 수 없이 많았다”고 말한다.

개점 후 상당기간이 지났는데도 물품을 미처 확보하지 못해 고객이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고 K씨는 전한다.

상품소싱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월마트에 납품하던 한 중소업체 사장은 “월마트가 마크로를 인수한 후 바이어들의 자세가 180도 달라져 공급업체들에게 원성을 들었다”고 말한다. 월마트라는 큰 배경만 믿고 갑자기 고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공급업체와의 갈등을 불러온 것이다. 그 후에도 상당기간 이런 바이어들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그의 얘기다.

매장 인테리어에서도 미국적 스탠더드를 고집하는 실수를 범했다. 5년 넘게 할인점 인테리어 공사를 맡아온 이규성씨(46)는 “한국 고객들은 할인점에서도 밝은 조명과 고급스런 인테리어를 중시한다”며 “월마트는 이것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미국 월마트의 성공비결은 한마디로 저가격 정책이다. 저가정책으로 수익을 내려면 저비용 운영은 필수다. 월마트는 이런 원칙을 고수한 탓에 돈을 꼭 써야할 곳에도 쓰지 않았다. 그 결과 전반적으로 매장 조명이 어두운데다 창고형 매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고객들에게 싸구려같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다온 유통전문 컨설턴트 전제우씨(51)는 “월마트는 한국 시장에서 어떤 고객들에게 물건을 팔아야 하는지도 몰랐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 월마트의 주 고객은 중 ·하류층, 정확하게는 백인 하류층과 흑인, 히스패닉이다. 반면 한국의 할인점은 주 고객층이 30대 중반~40대 초반의 중상층이다. 미국식 저가정책만으로 접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미국에서는 어쩔 수 없을 때 할인점에 가서 식료품, 상품을 구입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쇼핑은 필수품을 구입하는 이외에 재미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출 초기 월마트는 대부분의 할인점들이 운영하던 셔틀버스, 문화센터 등 편의시설 운영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기의 안정적인 시장 진입에 실패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렇다고 월마트가 한국에서 저비용을 실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금감원 감사보고서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 1만원짜리 상품을 하나 팔기 위해 월마트는 1,400원을 쓰는 반면 이마트가 1,200원을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원 차이는 할인점의 상품 ·가격 경쟁력과 직결된다. 또 상품이 매장에 머물러 있는 기간이 이마트는 평균 10일 정도인 반면 월마트는 30일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만큼 월마트 상품이 잘 회전되지 않는 것이다. 상품이 오래 머물러 있는 만큼 관리비용도 늘어난다.

타깃 고객층이 같았다고 해도 월마트의 저가정책은 처음부터 한국에서 먹히지 않는 방식이었다. 미국 월마트에서 저가 전략이 가능했던 것은 대량매입, 아웃소싱, 물류시스템 등을 통해서였다. 미국 내 월마트라면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아직 점포수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한국에선 대량매입도, 아웃소싱도, 물류시스템 구축도 어렵다는 얘기다. 롯데마트의 한 바이어는 “월마트가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제품을 소싱하면 전세계 4,300개 매장에서 팔 수 있어 매입단가를 낮출 수 있지만, 삼성전자가 국내에 고작 15개 점포를 가진 월마트에 입점하면서 단가를 낮출 이유가 있겠느냐”고 말한다.

다점포 확보에 실패한 탓에 월마트가 자랑하는 인공위성을 통한 물류통제도 한국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한 물류전문가는 “미국에서 월마트의 운송차량들은 수천 개의 점포들을 찾아다니며 언제나 이동 중”이라며 “하지만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물류차에 싣고 돌아다녀봤자 어딜 가겠느냐”고 반문한다.

점포 부지 선정에서도 미국식을 고집했다. 미국에서는 시 외곽의 값싼 부지를 선정해 고객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와서 대량구매를 하는게 보통이다.

월마트가 진출 당시 인수한 마크로 4개 점(인천, 일산, 용인, 대전)은 모두 시 외곽에 많이 떨어져 있어 자동차 문화가 미국처럼 발달하지 못한 국내에서는 치명적인 핸디캡이 있었다. 월마트는 한국 사람들이 신선식품을 구입 하기 위해 매주 1~2회 정도는 매장을 찾는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런 기초적인 인식의 차이는 매장구성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가져온다. 이마트의 경우 곤돌라를 낮추어 마치 백화점과 유사한 형태로 매장을 구성하는 반면 월마트는 아직도 높은 곤돌라에 상품을 그득그득 쌓아놓는 방식을 고집했다.

그러면 월마트는 왜 다점포화에 실패했을까. 월마트는 신규 시장에 진출할 때 그 시장의 1위나 2위 업체를 인수해 조기에 시장을 장악하는 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는다. 일본에서는 200개 넘는 점포를 가진 백화점 체인 세이유를 통째로 인수했다. 월마트는 한국 진출 당시 선두주자였던 이마트, 까르푸는 물론 다음 순위인 킴스클럽, 롯데마트(당시 마그넷) 등의 인수가 불가능했다. 결국 고육지책으로 인수한 것이 마크로였다. 당시 마크로는 할인점 업계에서 하위업체였다. 그 후로 끊임없이 신세계를 통째 인수한다느니, 킴스클럽을 매입한다느니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나 경영층의 신속한 판단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같은 인수설에 ‘노’(No)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노 코멘트’라고 반복할 뿐이다.

이마트의 급성장 역시 월마트의 성장을 억제한 요인이다. 93년 국내 첫 할인점을 오픈한 이마트는 94년 미국 코스트코사와 합작해 국내 첫 회원제 할인점인 프라이스클럽을 운영하면서 세계 선진 유통업체들의 운영 노하우를 쌓았다. 월마트가 상륙한 98년 프라이스클럽 매각대금으로 이마트 점포수를 크게 늘렸다. 월마트 등 외국계 할인점들이 채 국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단기간에 전국적인 다점포망을 구축해 시장을 선점했다. 현재 이마트는 52개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30여 개의 부지를 확보해 뒀다. 월마트 등 외국계 할인점들이 할인점을 지을만한 좋은 땅을 대부분 선점한 상태다.

월마트는 한마디로 처음부터 한국시장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문제는 아직도 미국식 업무절차와 시스템을 고집하는데 있다. 월마트는 국내 진출한 다국적 기업 중 10위 권의 투자규모(약 5억달러)를 기록한다. 그럼에도 이렇다할 실속이 없다. 진출 당시에는 한국이 아시아시장 공략을 위한 발판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서도 맥을 못추면서 어떻게 아시아 시장에 진출할지 궁금하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다. 전문가들은 월마트가 근본적인 전략 수정 없이는 한국에서 승산이 없을 것으로 내다본다. 월마트는 최근 ‘수퍼센터’가 아닌 소규모 마트 형태의 ‘네이버후드 마켓’으로 틈새시장을 공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