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삼성SDI는 최대 거래업체인 네덜란드 필립스에서 공문 한

통을 받 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얼마나 수행하고 있는지를 요약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월드컵 스타 히딩크와 박지성이 있는 유럽 명문 프로축구단 PSV아인트

호벤의 모기업으로 유명한 세계적 전자업체 필립스. 필립스는 지난해 3

월 두 번째 `지속가능성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전세계 거래 기업을 긴

장시켰다. 보고서 핵심은 5만여 개 협력업체들에 기업책임경영(지속가

능성) 원칙을 확대 하는 것.

협력업체도 노조가입권 보장, 아동 노동 금지 등 노동조건을 비롯해 인

종과 성 , 종교에 따른 차별을 전면 금지하고 환경과 안전 분야 등에서

일련의 원칙을 지키도록 요구한 것이다.

필립스는 올 한 해 동안 전세계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이 원칙을 지키는

지 여부 에 대해 평가ㆍ감사하는 구체적 방법을 마련할 계획이다.

주요 대기업 협력업체는 이미 지난해 시범적으로 원칙을 준수하고 있

는지 점검 했다. 삼성SDI도 그 중 하나였다.

필립스는 내년부터 지속가능성 평가ㆍ감사에서 낙제점을 받는 협력업

체를 거래 대상에서 탈락시킬 계획이다.

필립스의 요구는 앞으로 닥쳐올 유럽과 미국 기업들의 변화 기류를 예

고하는 것이었다. 세계적인 전자ㆍ화학ㆍ자동차 업체들이 기업의 사회

적 책임경영을 내걸며 협력 업체에 쏟아내는 주문은 갈수록 강도가 높

아지고 있다. 환경 기준 준수에서부 터 노동 여건, 인권, 반부패 등으로

까지 넓어진다.

소니는 2001년 주요 납품업체들에 VFD(형광표시관) 관련 환경 규제를

공표했다 . 그해 소니는 네덜란드에 비디오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를

수출하려다 봉변을 당했다. 네덜란드 정부에서 수입 불가 판정을 받은

것. 부품 가운데 모니터와 시스템을 연결하 는 전선에서 카드뮴이 허용

치를 초과했다는 이유였다.

소니는 그로 인해 2000억여 원의 손실을 보았다. 이미지도 실추됐다.

다른 제 조업체들에도 소니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아야 된다는 경종이

전해졌다. 필립스나 소니 외에 JVC나 샤프 등도 납 카드뮴 등 유해물질

관련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2001년 부품 환경성 정보 제공 의무화, 2003년 고객사 환경성 정보 요

구, 2006 년 유럽환경규제, 2008년 환경 무역 장벽화(블루라운드) 등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삼성SDI는 선진 기업들의 이런 요구에 맞춰 전담팀 구성에 착수했다.

거래업체들의 요구도 작용했지만 최고경영자(CEO)가 일찌감치 이쪽에

눈을 뜨고 있 었다 . 외부 컨설팅업체까지 활용해 다각도의 진단과 내

부 작업 끝에 지난해 말 `지속 가능경영 보고서`라는 결과물을 내놓았

다. 지속가능경영 보고서 발간은 미국 유럽 일본 등 관련 기관과 기업

들이 삼성SDI 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대

외에 천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같은 시기 현대자동차도 `지속가능

경영 보고서` 발간에 동참함으로써 물꼬를 넓혔다.

삼성SDI 관계자들은 국외 기업설명회(IR) 때나 주요 거래처에 대한 마

케팅에 나설 때 보고서를 가져간다. 자신들의 협력업체에도 기업책임

경영과 관련된 기준을 따르도록 유도하고 있다.

지명찬 경영지원실 상무는 "협력업체를 포함해 모든 이해관계자 현황

을 파악해 놓고 평소 이들과 관계를 관리하는 일이 바로 지속가능경

영"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와 포스코도 지속가능경영을 새로운 경

영 이념으로 채택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기

업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소비자 종업원 협력업체들과 성장에 대

한 비전을 함께하고 밀접한 협력관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며 지속가능

경영 목표를 명시적으로 밝혔다. 포스코는 지난 4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세부 활동계획과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10월에는 회계법인에서 공식적 검증을 받은 보고서를 발간할 계획이다.

하지만 나이키는 이를 새로운 전기로 활용했다.

마케팅 비용만큼 외주공장 관리에 돈을 쏟아부었다.

하도급공장을 선정할 때 싼 비용만 따지지 않고 작업환경, 아동 고용 여부 등을 고려해 순위를 매겨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나이키 협력업체는 이런 기준을 엄격하게 지켜야만 했다.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지방은행 코오퍼러티브뱅크(Co-operative Bank)는 사회 책임경영을 통해 기업 성과를 극대화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002년 코오퍼러티브뱅크 실적은 눈에 띄는 성장을 일궈냈다. 전년 대비 각각 세전이익 14%, 가계예금 11%, 대출 12% 증가라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경영진은 이 같은 성과를 낸 배경을 파트너십 경영을 모토로 내건 사

회책임경영 덕분이라고 자평하고 있다.

주주, 고객, 임직원과 가족, 지역사회, 정부 등 이해관계자에 대해 기업 가치 를 공유한다는 원칙 아래 7가지 실천 지침을 만들어 적용했다.

여신 대상 기업심사에서 윤리적 환경적 기준을 적용했고 이런 원칙에 의해 44 개 기업에 대한 여신이 거부되기도 했다.

코오퍼러티브뱅크의 파트너십 경영은 자신들과 거래하는 기업과 가

계의 호응으 로 이어졌고 고객들의 은행에 대한 좋은 평가는 다른 고

객 확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낳은 것이다.

기업이 사회책임경영에 눈을 돌린 것은 궁극적으로 기업 가치를 최대

화하기 위 한 노력 중 하나다.

나아가 사회책임을 요구하는 소비자와 고객 그리고 공동체 수요에 부

응하는 기업의 적극적인 `온 디맨드(On Demand)` 전략인 것이다.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가 누구냐를 파악하고 이들 수요를 점검하

는 데서 사회책임경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병욱 LG환경연구원 원장은 "기업의 사회책임경영은 이해관계자 파

악에서부터 출발한다"며 "이는 곧 기업이 부닥칠 수 있는 리스크를 평

소에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정의했다.

사실 경제적 측면에서 지속 성장하기 어려운 기업이 환경분야나 사회

분야에 눈을 돌리기는 어렵다.

기본적으로 수익과 매출 구조에서 토대를 갖춘 기업이 사 회책임경영

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장지인 중앙대 경영대 교수는 "기업의 사회책임경영은 선택 대상이 아

니라 궁극적으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생

각을 가져야 한 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이 사회에 이익을 환원하고 봉사한다는 차원으로 보면 안

되고 공동체와 `더불어 산다`는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해봉 에코프론티어 대표는 "사회책임경영도 환경경영도 배경은 경

제적 이유" 라며 "내부 경쟁력 확보를 위해 도입하는 것이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차원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오너십이 확실한 우리나라 기업 풍토에서는 지속가능경

영 도입이 오히려 더 쉽게 촉진될 수 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인모 현대자동차 환경경영전략팀장은 "환경 사회 경제를 따로 생각

해서는 안 된다"며 "환경보호 안에 경제적 사회적 부분이 함께 연결돼

있다"고 제시했다.

조청명 포스코 정책개발팀장은 "자본수익률(Return of Capital)은 경제적 관점 만이 아니라 환경과 사회적 관점에서도 높아야 한다"며 "진정한 일류기업은 돈 도 잘 벌고 사회책임에도 충실할 때 이뤄진다"고 말했다.